1. 명량의 줄거리
1597년, 조선에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7년이 지난 후인 정유재란 때 정세가 많이 혼란스러웠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한양으로 압송을 당해 고문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칠전량 전투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전투 불능이 되고 칠전량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 해군은 남원성, 진주성 그리고 한양까지 점령을 하였습니다. 왕은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하였습니다.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을 받은 이순신은 칠전량 전투에서 살아남은 배 12척을 인수하였습니다. 인수한 배 12척으로 서해안 끝쪽 진도에 벽파진을 펼치는데 벽파진에서 불과 50리 밖에서 300척이 넘는 일본군들의 배가 집결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순신 외에 다른 부관들은 그 상황에서 도망갈 궁리만 하고 있고 일본군들은 어린진에서 집결하고 한양으로 진격한 후 조선의 왕을 잡아 전투를 끝마치려고 했습니다. 당시 일본군의 만행은 정말 눈 뜨고 봐줄 수가 없을 정도로 잔혹했습니다. 자신들에게 반항하는 조선인들의 코를 베고 아이들을 장난으로 총을 쏴서 죽여버리고 그러면서 주둔지를 정리하고 한양으로 진격하기 위해 일본군들의 별동대가 집결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권율은 이순신의 수군이 육군을 도와주었으면 했지만 이순신은 일본군의 수군이 아직 남아있는 걸 생각하고 바다에 남아 항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구루시마는 포로들의 목을 베어 벽파진에 보내고 그걸 본 병사들은 사기를 잃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을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더욱더 군사들의 군기를 바짝 붙잡았습니다. 명량에서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부관들은 이 전투를 절대 이길 수 없다고 이순신을 설득하려 했습니다. 이에 이순신은 포구 진영 앞에 병사들을 불러 모아 그 유명한 필생즉사 필사즉생 말을 남겼습니다. "살려고 하는 자는 죽을 것이고 죽으려 하는 자는 살 것이다."라는 말을 군사들 앞에서 비장하게 말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이순신은 전남의 진도에 있는 해남반도 사이에 갑자기 길이 좁아지는 해로가 있는 울돌목이라는 곳에서 전투를 벌였습니다. 왜군들의 함선이 해로의 좁은 길로 인해 막혀 한꺼번에 많이 나아가지 못하지만 점점 함선이 많아지자 빠른 해류에 의해 서로서로 부딪히기 시작했습니다. 화가 난 구루시마는 이순신의 배에 직접 달려들어 접근전을 시작했습니다. 결국 구루시마의 목은 베이고 후방에 있던 왜군들의 함선은 퇴각을 해 완전한 이순신의 승리로 전투는 끝이 났습니다.
2. 역사적 배경
1592년, 임진왜란 이후 일본이 재침을 한 1598년 9월 16일 이순신 장군이 울돌목에서 왜군 함선 330척을 단 12척으로 승리한 전투를 말합니다. 명량대첩 이전 이순신 장군은 부산에 있는 일본군의 본거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거부해 수군의 지휘관 직인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서 쫓겨나고 일반 병사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받아 칠천량 전투를 하였지만 이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여 조선의 수군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선조는 조정들과 함께 이순신 장군을 다시 수군의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자고 의견을 모아 이순신 장군은 다시 수군의 총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받았습니다. 그렇게 지휘관으로써 명량 해전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13척의 배를 가지고 133척의 일본군을 물리치기엔 무리라고 생각하여 적의 상황을 자세하게 보고 좁은 해로워 거센 해류가 있으면 유리하겠다고 생각한 이순신 장군은 조선 수군의 근거지를 명량 근처로 옮겼습니다. 일본군이 명량으로 진입할 때 거센 해류로 인해 배는 서로서로 부딪혀서 부서지고 결국 이순신 장군의 승리로 전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그 결과, 전함 31척이 파괴되고 8000명 정도가 죽거나 큰 부상을 입는 큰 손해를 보고 물러났다고 합니다. 이 전투는 그 유명한 거북선이 없이 승리한 이순신 장군을 대표하는 전투 중에 하나입니다. 또한 "명량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이 패배했다면 조선의 일제 식민지화가 300년 정도 앞 당겨졌을 것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조선의 역사를 바꾼 그런 위대한 전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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